요즘의 있기

되도록이면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끄고, 옆집에서 개미소리만한 전화통화 소리가 들리면,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인다. 수면 위에 풍덩 던져졌음에도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듯 무모한 그런 마음. 여기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종의 해를 끼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귀신이라면, 아마 사람들이 놀랠까봐 가능한 한 어둠 속에 빈 곳만을 찾아서 다닐 것 같아. 라고 혼잣말을 해버리곤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핀다. 어딘가에서 풍덩- 소리가 들려온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네에 다녀왔다. 기분탓인지, 내가 동네를 떠난 이후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반갑다기보다는,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를 보는 것 처럼 안타까운 마음. 골목골목 지날때마다 그때 앉았던 자리, 만났던 사람들, 보잘것 없는 다짐이라던가 불평 따위가 떠올랐다. 장소가 기억을 보관하고 있었다. 어느날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잃어버린, 다시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물건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처럼, 피식- 웃으며 걸었다. 그렇게 아무데나 흘려버린 기억들은 아마 '나'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없는, '나'라는 단서가 없는 정보들이었을게다. 문득 그렇게 버린 기억들을 하나씩 수거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가,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는 프루스트의 소설이 생각나서 단념하고만다. 

더위가 불쾌한 이유는, 몸에서 쏟아지는 온갖 분비물과, 습한 공기, 그에 젖어 무겁게 처진 옷가지, 불쾌한 냄새. 그것들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이 '몸뚱아리'라는 것이 얼마나 거추장 스러운 '짐'인지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찬 새벽에, 레비나스가 그려낸 '존재하기'에 관한 아름답고 구슬픈 문장들을 읽고 탄성을 지르다가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는 그냥. 어쩔 수가 없다. 나도 어쩔 수가 없고, 아마 레비나스도 어쩔 수가 없을 거다. 존재하기는, 애잔하고 숭고한 무엇이라기보다, 끔찍한 노역이 되어버린다. 가끔 다섯 살 난 우리 조카녀석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가 느끼는 가뿐함이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보곤 한다. (아마도 그 '가뿐함'조차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야말로 심신이 평행하여, '존재자가 존재의 주인'이라던가 '항상 소멸하는 시간'이라던가 하는 얘기가 가능해지는게 아닐까?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오히려 슬플때의 안타까운 표정을 짓게 된다. 그것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일까. 욕망이 극복되어지는 순간. 고양이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을때와 비슷한 감정. 아름다운 것들은, 이미 지나간 것들이어서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워서 금방 지나가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