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불행에 대해서는 '왜 나는 불행할까?' 하는 질문들을 던지게 되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왜 나는 행복할까?'하고 의문을 품지 않는다. 우울한 감정에 대해서는 극복되어져야 할 상태로 생각되지만, 기쁨의 감정을 극복하려는 사람은 없다. 극복이라는 단어에 어떤 낮은 단계로부터 높음으로 고양시키는 시각적 인상이 담겨있는 것처럼, 불행, 슬픔, 우울, 절망 등에는 물리적으로 낮은 상태를 상정하고 그보다 나은, 좋은, 올바른 것들은 높이에 올려놓고 생각하려는 습관이 우리에게 있다. 불행이라는 관념이 당하는 이러한 차별은 불행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불행만이 우리의 모든 관심을 독점하고 있다. 우리가 왜 불행한지, 왜 우울한지, 또 왜 슬픈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려고 하는 데에 반해, 행복한 순간 우리는 그저 멍청하게 '행복! 행복! 행복!'을 외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슬픈 감정을 두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것 처럼, 행복감에도 능동적인 입장과 수동적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슬픔의 정도에 따라 수십가지의 다양한 형용어휘가 달라붙는 것처럼, 행복에도 그 정도에 따른 합당한 분류와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쭈뼛

어떤 외국인 친구가 장문의 이메일을 써서 '없었던 것처럼 있고 싶다' 라는 그림의 숨은 의미에 대해 질문해왔다. '아, 그 그림은 어떤 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이었어요. 제가 썼던 글...' 하며 그 글이 무슨 내용이었던가 궁금해 하며 책장 가장 높은 곳 먼지가 수북이 쌓인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 느낌으로 이동식디스크를 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다행히, 오래전 운영했던 블로그, '악크로스더유니버스닷컴' 폴더에 유물처럼 차곡차곡 모든 글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 글을 찾아 읽다보니 그 당시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아마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그렸던 것 같아-' 하고 대강 설명해주고나서, 다시 오래전 글을 읽다보니 뭐라도 쓰고싶어졌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하는 망할 것들을 쓰기 시작한 이후, 어림잡아 2011년 즈음부터 글을 쓰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림으로 말해요'를 터득하고 난 이후 글쓰기에 흥미를 잃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글'에는 뭔가 어마무시한 감정들을 쏟아내야 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림이든 글이든 보나마나, 읽으나마나 한 내용이라면 안쓰는게 낫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다시 들춰보니 적어도 내게는 나름 의미 있는 기록이었던 것 같다. 하여 이 글은, 다시 뭔가를 써보기 전의 쭈뼛거림 정도가 되겠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마시라).

아주 검고 멋있는 그림

외로움에 굳건한 사람들을 보면 늘 사랑에 빠진다. 감독도 연기자도 필요없는, 구경당하지 않아도 괜찮은 덤덤하고 시시한 그들의 문장들 속에서 질투를 느낀다. 어딘가로 도망칠 필요없어 일말의 초조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당연한 일주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항상 검고 매끈한 사람들과의 가졌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뒤늦게 그리워한다. 정떨어지게 아름다운 그들의 초연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그 앞에서 적당한 검정색을 찾지 못해 촌스러운 컬러를 택하고 말았던 나의 불안한 표정과 말투. 끝내 이색 저색 섞어보다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어정쩡한 회색으로 화면을 뭉게버리고 말았던 내 모습들. 그 모든 일들이 그리워진다.

검고 매끄러운 그 사람들을 떠올리다 보면 종종 아주 검은 색의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지는데, 그럴 때면 오줌이 마려운 것 처럼 불안과 초조에 휩싸이고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검정색 안쪽으로 도망치듯 잽싸게 뛰어들어가는 나를 보게된다. 뒤를 이어 그를 따라 들어가는 또 다른 검은 그림자와 함께.

이 시시한 추격전은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나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난 뒤, 이제 정말 아무것도 가장할 필요와 의욕이 사라진 어느 날, 비로소 외롭고도 굳건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나를 구경하던 또 다른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면서 부터 시작된 이야기.

눈구멍 뒷편의 눈구멍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무한한 검정 속으로 도망치려 한다해도, 아! 하면 아! 하고 따라붙고마는 특유의 탄성이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잦은 탈주와 추격으로 두 쌍의 눈구멍 사이의 유격이 헐거워진 탓에, 그 자리에 멈추어 있더라도 쫒고 쫒기는 모양새로 정지해 버린다.

그래서 아주 검고 멋있는 그림을 떠올릴때면, 아주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더라도 늘 착란상태이다. 가장 시끄러운 음악과 가장 조용한 음악을 분주하게 번갈아 재생시키며, 가장 추잡한 것들과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번갈아 생각해 낸다. 불을 모두 껐다가 금방 다시 켜고, 모든 것에 무심했다가 금방 사랑하게 된다.

관광객

관광觀光이라는 말은 참 아름답다. 말 그대로 반짝이는 것들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빛나는 아름다운 것들은 말없이 그저 걷기만 하는데에 더없이 아름다운 구실이 되어주었다. 그 아름다운 구실조차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어느 시점엔가는, 그저 그렇게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두 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나는 그러니까 보는 장치를 이고 다니는 어떤 관광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관광觀光에는 순진하고 음흉한 의도가 있었다. 외로워지면 스스로 견디다 못해 어디엔가 감추어 두었던 무엇인가를 꺼내어 보여줄 것이라 믿었고,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걷다보면, 고문을 이기지 못해 봉인된 그 무엇인가가 미끄덩 하고 쏟아져 나올거라고 믿었다. 감춰지고 봉인된 무엇인가가, 어디엔가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한편으로는 그 어디인가 하는 지점을 어느 순간에 잃어버린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어느 순간을 되찾아 줄 어딘가가 존재할 것이라 믿었다. 나의 관광은 스스로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협박이자, 스스로 발견하기 위한 탐험이었다.

하지만 협박은 전혀 먹히지 않았고, 탐험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뒤섞인 채 함축되어있는 시간과 공간을 다시 풀어헤쳐 펼쳐놓고, 마치 처음 들어선 것처럼, 마치 처음 맞이한 것처럼 울거나 웃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정말 웃기고 슬픈 이야기일테니까. 문득 죽거나 아직 살아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싶었다. 나도 이제 그냥 지나가며 관광觀光하는 객客일 뿐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원형불면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하루가
의미있는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하루가
어제와 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하루가
변화와 차이가 없는, 의미 없는 하루가
나를 불면하게 한다.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알고있던 관념들로부터
그동안의 기억들로부터
물리적 신체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으며,

자유롭기 위해서는
모든 관념들에 대한
모든 기억들에 대한
모든 경계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불면은
그 모든 것들을 흐릿하게 하여
차이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차이를 위한 노력에 피로를 느끼게 하니
나를 다시 불면하게 한다.

화초와 나란히

화초는 얼굴이 없다. 화초의 정면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화초 자신만이 자신의 정면을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화초의 정면을 알지 못한다. 화초는 얼굴이 없다. 나는 얼굴이 있다. 나의 얼굴은 바라보고 바라봄을 당한다. 바라보는 쪽으로 열려있어서 닫힐 수가 없다. 나의 정면은 공유되므로 나는 나만의 정면을 바라볼 수 없다. 나는 완결 지어질 수 없다. 화초는 스스로 정면을 가진 채 완결되어 있다. 화초는 고독하다. 나는 고독할 수 없다. 나는 화초의 고독을 탐낼 수 없다. 나는 화초의 고독이 탐이난다. 그래서 화초를 고독하게 놓아둘 수밖에 없다. 화초는 고독하다. 화초는 얼굴이 없다. 화초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화초는 나를 바라볼 수 없다. 화초는 얼굴이 없다. 화초와 나란히 나는 고독하다. 화초와 나는 나란히 자신의 정면을 바라본다. 갑자기 화초가 눈물을 흘린다.

버려버린 세 가지

해질 무렵, 나는 무덤같은 정육면의 석실 가운데로,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초가 놓여져 있는 공간 속으로 던져져, 어림잡아 해가 뜨겠거니 싶을 때까지, 내부의 산소를 모두 소모할 때까지, 가끔씩 무언가 추구하는 듯한 포즈와 표정을 지어보이며, 그것이 자유일까, 아름다움일까, 명예일까, 아니면 그냥 살아있음일까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러다가 아무 것에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있는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또 그러자니 너무 고상한게 아닐까, 너무 촌스러운게 아닐까, '무위'를 '위'해 치르기엔 그 댓가가 너무 크지않나 하며, 무위를 위해 치르고 있는 월 30만원의 가치를 떠올리다가, 30만원짜리 프로젝터를 하나 사고싶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던져버리듯 고개를 저으며, 그게 아니라 뭔가 크나큰 이유와 사명이 있는 게 틀림 없어 라고 마음 속으로 외치며 프로젝터 대신 그 어떤 고상한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대가리를 굴리고 또 굴리고, 그러다 도저히 갈피를 못잡겠다는 듯 대충 스륵 넘겨 덮어버리곤, 소파 위에 던져놓고, 그 근처에는 앉지도 않겠다는 듯 입을 꾹 다물어서 버린다. 입을 꾹 다물고 나니 왠지 슬프게도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고독을 위로하는 일 보다 시급한 일은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보다가 재수없게 걸린 초, 내 눈치를 보는 듯, 움직이지도 소리내지도 않고 타고 있는 초, 내가 일 분 일 초 쉬어야 할 숨을 가로채 얄밉게 초 위에 앉아있는 초, 내 속이 타는 줄도 모르고 타고 있는 이 초, 내가 쉴 숨을 왜 네가 쉬냐며, 마치 앞으로 쉬어야 할 한숨들을 이 참에 다 뱉어버리겠다는 듯, 내가 쉴테니 너는 쉬어라, 힘차게 훅 꺼버리자, 라는 듯 꺼버리자, 그렇게 매정하게 초를 끄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것이라는 듯 연기가 피어올랐고 나는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듯한 낯으로, 불을 끄고나면 적어도 이 방의 평수 만큼은 산만한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것을 어떡해 하고 말해서 버린다.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가, 맨 처음 연필로 애매하고 흐릿하게 앞으로 다가올 어떤 결말을 암시하듯 슥슥 이리저리 흔적을 남기고는, 너그럽고 친절한 시선으로,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슬픈 결말은 아닐꺼야- 라며 일단 안심을 시켜두고는, 그 관념과 그 형이상을 몽롱한 심정으로 즐기다가, 조금만 더 놀게 해달라고 떼를 쓰면, 안돼 이제 그만해- 하고 실랑이를 부리는 여유조차 없이 대뜸, 0.1 mm, 아니 좀 더 굵고 짙은, 0.3 mm 쯤 되는 코픽사의 멀티라이너로, 왜 멀티라이너일까, 아무튼 힘을 꽉 주고는, 애써 부드럽게 그린 것 마냥, 그 선을 그을 때에, 마치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는 듯, 가뿐한 체하며, 가끔은 씨익 웃어보이기까지 하며, 선을 그어, 경계에서 간지럽게 주저하던 이 마음과 저 마음을 떼어 놓은다음, 이제는 너희는 보려고 해도 도저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라고 말없이 말하는 듯한, 궁극의 검정, 스페셜 블랙이라고 뚜껑에 적혀있는, 코픽사의 마커펜슬로 단애와도 같은 명도로, 무한한 백색과 무한한 흑색으로, 둘을 이별시키고는, 애초에 그런 연약한 연필자국따위, 개나 줘버려 하는 듯한 명쾌한 손짓으로, 하지만 왠지모를 미련을 느끼며, 손등으로 슥슥 지워, 입으로 훅훅 불어서 버린다. 쓸데없이 또 시간을 허비하여 버렸다.

녹색광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빛,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 같은걸 바라 본 게 언제였던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나 달을 바라볼때면, 그 생김 탓이겠지만, 어떤 하나의 거대한 '눈'을 상상하곤 한다. 그 거대한 눈에서는 감정을 찾아 볼 수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너무나 우월해서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고 또 그래서 한없이 무정한 그런 느낌이랄까. 너무나 절대적이어서, 내가 '바라본다'기 보다는 '보여지고 있다'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 절대적인 시선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모처럼 내가 나와 함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헐거운 느낌 없이 내가 나에게 꼭 맞는 것 같은 쾌적한 기분.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뭔가가 되고 싶고, 되어야 한다는 그런, 강박적인 명사로서의 내가 아닌, 그냥 그대로 '있다'고만 말해도 좋을 그런 동사로서의 느낌. 축축하고 습한, 의심많고 연약한, 타자들의 시선이 말끔하게 멸균된 듯한 그런 보송보송한 느낌. 말이다.

요즘의 있기

되도록이면 들키지 않으려고 한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불을 끄고, 옆집에서 개미소리만한 전화통화 소리가 들리면, 발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인다. 수면 위에 풍덩 던져졌음에도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듯 무모한 그런 마음. 여기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종의 해를 끼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귀신이라면, 아마 사람들이 놀랠까봐 가능한 한 어둠 속에 빈 곳만을 찾아서 다닐 것 같아. 라고 혼잣말을 해버리곤 깜짝 놀라서 주위를 살핀다. 어딘가에서 풍덩- 소리가 들려온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네에 다녀왔다. 기분탓인지, 내가 동네를 떠난 이후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반갑다기보다는,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를 보는 것 처럼 안타까운 마음. 골목골목 지날때마다 그때 앉았던 자리, 만났던 사람들, 보잘것 없는 다짐이라던가 불평 따위가 떠올랐다. 장소가 기억을 보관하고 있었다. 어느날 호주머니에서 빠져나와 잃어버린, 다시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물건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처럼, 피식- 웃으며 걸었다. 그렇게 아무데나 흘려버린 기억들은 아마 '나'를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없는, '나'라는 단서가 없는 정보들이었을게다. 문득 그렇게 버린 기억들을 하나씩 수거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가,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 없는 프루스트의 소설이 생각나서 단념하고만다. 

더위가 불쾌한 이유는, 몸에서 쏟아지는 온갖 분비물과, 습한 공기, 그에 젖어 무겁게 처진 옷가지, 불쾌한 냄새. 그것들 자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들이 이 '몸뚱아리'라는 것이 얼마나 거추장 스러운 '짐'인지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찬 새벽에, 레비나스가 그려낸 '존재하기'에 관한 아름답고 구슬픈 문장들을 읽고 탄성을 지르다가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는 그냥. 어쩔 수가 없다. 나도 어쩔 수가 없고, 아마 레비나스도 어쩔 수가 없을 거다. 존재하기는, 애잔하고 숭고한 무엇이라기보다, 끔찍한 노역이 되어버린다. 가끔 다섯 살 난 우리 조카녀석이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가 느끼는 가뿐함이란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보곤 한다. (아마도 그 '가뿐함'조차 느끼지 못하겠지만) 그야말로 심신이 평행하여, '존재자가 존재의 주인'이라던가 '항상 소멸하는 시간'이라던가 하는 얘기가 가능해지는게 아닐까?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 오히려 슬플때의 안타까운 표정을 짓게 된다. 그것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일까. 욕망이 극복되어지는 순간. 고양이와 두 눈을 마주하고 있을때와 비슷한 감정. 아름다운 것들은, 이미 지나간 것들이어서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워서 금방 지나가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본 소피스트

깨끗해지려고 내가 더럽다고 말하면, 더러운 모두가 내게 더럽다고 고백할 것이다. 더러는 자기가 더 더럽다고 주장할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더욱 더 더러워져야 할지도 모른다. 너무 더러워지려고 해서 가짜의 더러움으로 더럽혀 나보다 더 더럽다고 말하는 그들보다 더 더럽게 보이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더러움은 진짜의 더러움이 아닐 것이다. 사실 그것은 진짜 더러운 것이다. 더러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깨끗하게 보여줄 수 있는 더러움만이 진짜 더러움일 것이다. 진짜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보여주고 나면 나는 깨끗해질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모든 것보다 더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깨끗하려하는 그 마음조차 더럽기 때문에 깨끗해지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더럽다고 깨끗이 말하면 깨끗할수 있으나, 내가 더럽다고 깨끗해지려고 하면 더러워지는 것이다.

나는 고독을 얻기 위해 문을 닫고 숨었다. 드디어 고독을 얻었다고 소근거리자 그 소리를 내가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다시 문을 열고 반대편으로 가 숨었다. 이번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니 내가 고독을 얻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나는 문에다 대고 고독을 얻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고독을 얻었다는 것을 볼 수 없었기에 믿지 않았다. 나는 고독을 보여주기 위해 방을 새로 만들어 나를 떠밀고는 고독에 대해 말하면 고독할 수 없으니 고독 속에 조용히 홀로 있으라- 말하고는 나를 가두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저 안에 고독과 함께 내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고독한 나는 내가 가두었으므로 나는 내가 고독을 얻었다는 것을 나는 믿었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내가 고독하게 나를 가두었다는 것을 믿었다. 나는 고독 속에 갇혀있는 나를 꺼내 그것을 믿게 하고 싶었지만, 고독 속에 있는 나는 약속대로 홀로 조용히 고독과 함께 고독하게 있었다.

주어 버려

사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듯 줍던 손을 멈추고 행간으로 숨는다
말하는 그대로가 다 이루어지다니, 이러다 자칫 성공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권태마저 흥미로운 것이었는지 금방 씻은 손을 씻다 또
씻고 상처가 다 나으면 자비로움에 감사하며 말해야지 오 주어도
모른다고 욕망이 다 바닥날때가 있는지 보일라를 켜고 정신을
건조하게 어머니의 투정과 친구의 허영에 대답하지 말아야지 또 주어

아무렇지 않다 하다가 아무렇지 않다 쓰다가 대담하게도
처음부터 다시 말 하는 것을 다시 다 배워볼까 결심해야지
늙은 나무가 되는 것이나 밑둥을 움켜쥐는 것이
다 다 아무렇지 않으니 나에게 양해를 구해야지
버젓이 사는 것에 대해 일일이 고백하고
말해야지 주어 주어버려

귤과 나

귤을 먹으며, 귤의 세계를 생각한다. 귤은 귤 바깥의 세계를 영위한다. 귤은 귤 내부의 사정을 알 수가 없다. 귤은 나처럼스스로의 내부를 돌보지 않는다. 내가 귤 한쪽 궁둥이에 구멍을 내고,나의 일부를 흘려보내면 그제서야 귤은 상처를 자각하고 나와함께 귤의 내부로 흘러들어간다. 나는 귤의 내부에서 귤의 알갱이가, 알갱이의 수분이, 수분의 입자가 된다. 귤은 나로인해 비로소 귤의 나를 자각하게 되지만, 귤은 귤의 바깥을 잃어버리고 만다. 귤의 내부의 중심의 가운데에서 나는 더 힘을주어 귤의 바깥의 외부의 겉을 향해 뒤집어 깐다. 그러자 귤은 다시 또 나의 입의 목구멍의 위장의 내부의 중심의 안쪽을 향해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나는 귤의 바깥에서 귤의 내부를 외부로 만들어, 그 외부를 나의 내부로 집어넣는 동안 그것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귤을 다 먹고나서 나는 내 안에 들어앉아 두개의 구멍으로 들이치는 바깥 세계를 구경했다. 나는 내 안에서 다시한번 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귤은 나에서 시작하여 끝난 지점이었고, 귤에서 시작해서 멈추어야 하는 지점이 나였다. 또한 나의 안쪽의 바깥이 귤이었고, 귤의 내부의 외부가 나였다. 세상은 귤 아니면 나, 나 아니면 귤이었다. 귤의 세상은 나이고, 나의 세상은 귤이었다. 나와 귤을 합치면 전부가 되었고 전부는 이상하게도 안과 겉이 따로 없었다. 귤과 나는 그것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전부에 걸터앉아 서로를 먹고 또 먹었다.

없었던 것처럼 있고싶다

식물을 잘 키우고 싶다
기지개를 뻗을 때 처럼 찌릿하게 
멈추어 자라는 것들과 유대를 나누고 싶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함께 부스럭 거리고 싶다
거미가 내려앉아도 놀라지 않을만큼 정지하고 싶다
햇볕이 닿으면 깜짝 놀라고 비가오면 젖어버려 짙은 색을 내고 싶다

정지해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점점 움직이고 천천히 흔들리는 것들은 아름답다
정지해있는 줄 알았는데 점점 자라나는 것들은 아름답다
자라나는 것을 자라게 해주는 숨소리는 아름답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만큼 작아지거나 거대해지고 싶다
그 형체를 볼 수 있을만큼 작아지거나 거대해지고 싶다
그 움직임을 눈치챌 수 있을만큼 작아지거나 거대해지고 싶다

무성하게 나무로 가득찬 숲에서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눈을 감고싶다
겨울 새벽 차없는 차가운 빈 도로에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장맛비를 맞고싶다
너의 몸 너의 무릎 너의 팔꿈치 그리고 너의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사이에
크고 작게 그림처럼 둥글게 맺힌 반쪽짜리 곡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싶다
백미터 출발선에 서서 출발 신호와 함께 퇴장하고 싶고
내리막길을 혼자서 내려가는 축구공을 걱정없이 바라보고싶다
새벽이 다 끝나갈 무렵 블라인드를 내리고 잠들고 싶다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살고싶다
나와 관계가 있는 별들에서 살고싶다
그 별에서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나와 관계가 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살고 있던 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 별에서 나와 관계가 없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싶다

그렇게 아름다운 별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엔
마치 내가 없었던 것처럼 있고싶다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잊어버릴 만큼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고 싶다
마치 원래 그렇게 있었던 나무처럼
소외되고 잊혀진채 무한하게 바라보고싶다

이런 파편적인 글 말고요

그리스 시대의 원자론자들은 과연 지금과 같은 극세極細-극미極微의 과학 기술의 발달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 세상 모든 물질은 결국 쪼갤 수 없는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을것이다.' 라는 말은 그저 어느 풋내기 백수가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던진 호언은 아니었을까? 전 세계 에너지를 다 끌어오는 한이 있어도, 기어코 그 궁극의 알갱이- 를 '관찰'해보겠다는 듯 혈안이 되어있는 지금의 과학자들을 보면, 음뭐랄까- 순진한 것 같아.

-
마음대로 울고 웃고 할 수 있는 그런, 우리에게 안전한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이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거나 만지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또 돈으로 사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무엇인가가 가득 찬 세계다. 세계가 내앞에 새롭게 들어선 것인지, 원래 있던 그 문에 내가 우연히 들어선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내 예감에 이것은 원래부터 있었으며 나와 더불어 자라왔다. 이 세계의 장점은, 서로 교감하고 있는 존재자들과 그런 일종의 접지상태를 그저 향유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서로 닿아 있지만 만지고 있지는 않고, 서로 교신하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 이 세계의 성립-조건이기 때문이다. 

-
이 세계는 나와 무관하지 않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말 참 멋있다 생각했다. 무관한 세계로부터 무관하지 않은 세계로 무한하게 열린다고 하는 이미지는 멋있다 생각했지만, 반대로 무한하게 희석되어 공중분해 된다고 생각하면 왠지 서글프다.

-
"나란것은, 타인들과의 상대적 구조속에서 항상 끝없이 해면을 이루고 출렁이는 일종의 면적. 공간에 대한 추상 일 뿐입니다. 자기동일성은, 그것들이 흩어지지 않게, 뜬금없이 불필요한 기억들을 망각해 나가며, 중복되는 상들을 통합해나가며, 스스로 나라는 이미지가 중첩되어 농도가 짙어진 하나의 겹쳐진 무엇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망각하고 통합해 나가는 그 주체가 당신입니까?"

-
"작품을 한다기 보다는, 글쎄요. 작가 흉내를 내고싶은 것 뿐인지도 모르겠어요. 지금에 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건 흉내내기 뿐인지도 모르죠! 작가님 소리도 듣고싶은 것 같고.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며 산다죠. 풋- 가끔, 전시를 앞두고 있답시고 무슨 대단한 사업이라도 벌이는 양 투덜대고 있는 내 꼴이 우습기도 해요. 오! 어쩌면 이러한 자조섞인 멘트 역시시 '작가' 흉내내기의 한 방식인지도 모르겠어요."

-
"이유를 찾다보면,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저 해야한다라는 주체 없는 명령들밖에 남지가 않아요. 살아야 한다 라는 것에서조차도 말이죠."

-
"처음엔, 빼기 나누기. 나에게서 다른사람들과 닮은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누는거에요 나는 그들과 다르게, 계속해서 경계를 긋는거죠."

-
"어둠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한가요?"
"아니요 오직 잠. 뿐이에요. 잠을 잘때만 편안하죠."

-
"되도록 혼자 있으려고 하지만, 그리움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뿐이에요. 내가 죄라도 지었나요. 거절할 수 있게 해주세요."

-
마치 글자를 처음 배울때, 종이가 찢어지고 연필심이 부러지도록 손가락에 힘을 꽉 주던 그런 모습처럼- 나는 아직 이 세계가 찢어지도록 선명한 뭔가를 새겨넣고 싶은 충동이 있는가보다. 누덕도사의 수제자 머털이가, 스승님 말씀을 거스르고 무술대회에서 재주를 부리다가 왕질악 도사의 전기 지짐이를 당하던 그 장면을 잊을수가 없다. 뭐 좀 알았다고 깨방정 떨지 말라는 중요한 교훈. 

-
비가 올때에는 아무래도, 전류가 잘 통하듯, 각자의 AT필드가 허술해져서 마음과 마음이 더 잘 전해질 수 있는 장이 형성되는가 싶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낭만적일 뿐 실용적인데가 없다. 

-
한 사람의 비극적 죽음에 너도나도 눈물을 쏟아내며 감추어둔 마음들을 드러내어 고해하는 장면을 보며, 중학교 1학년때 얼떨결에 따라갔던 교회 여름캠프를 떠올렸다. 너도 나도 갑자기 대성통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왠지 모를 두려움에 고개를 파묻어버렸던 그때 그 기분. 

-
행복하고 완전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친절하고 진취적인 사람들과 헤어지고싶다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떠나고싶다
모두로부터 외롭고 모든것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일수록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 처럼
베풀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내놓는다

안정적이고 건전한 생활로부터 도망치고싶다
계획적이고, 차근차근 이어지는 생활을 망쳐버리고싶다
뜨신 배를 두드리며 웃고있는 나의 모든 삶을 빼앗고싶다
언제 땅으로 꺼져버릴지 모르는 얇고 얕은 세상일수록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처럼
안전하고 즐겁고 어른스러우려 한다

진지한 것은 낡고 촌스럽다
눈물은 진부하고 웃음은 헤프다
젊은이는 늙은이 앞에서 춤추고 노래한다
늙은이는 젊은 사람들 앞에서 혀를 차며 젊음을 동경한다
누구도 유일해서는 안되고 누구도 동일해서는 안된다
나는 언제나 소중하고 나는 어디에서나 흔하다

거시적 미시적 사랑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피부로 실감나게 느껴보고싶다. 몸이 산만큼 거대해지면 지구 회전축에서 멀리 떨어진 적도 부근에 드러누울것이다. 무릎 사이로 지나가는 구름도 만져 보고, 엄지발톱 부근에 자란 털이 바람에 부대끼는 것도 느껴보고싶다. 지구가 나를 꼭 끌어안고 있으면 달이 나타나 슬며시 잡아당기는 것도 느껴보고싶다.

  마음이 전해지는 것을 피부로 실감나게 느껴보고싶다. 몸 속 낱낱의 신경세포들 보다도 더 작게, 전기를 켜고 끄는 뉴런 보다도 더 작게, 더 작게 작아져서 궁극의 떨림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무한히 분쇄되고 싶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구름같은 전자들을 따라서 너의 마음 속에 있다가 우주의 마음속에 있다가 지구의 마음 속에도 가보고 싶다.

복잡한 다짐

나는, 하나의 광원에서 쏟아져나와 지구상 모든 곳에서 뭉게뭉게 떠 있다가, 거대한 입김들이 셀로판지에 새겨놓은 지도를 따라, 다시 흩어져 이완되어, 우주의 나이만큼 오래된 안전한 리듬을 타고 다시 응어리 져, 뭉쳐 져, 잠시, 여기, 지금, 있는 듯, 없는 듯, 보일 듯, 말 듯, 그래도 나인것처럼 그렇게 있었는데, 이제는 잘 보이게 싹둑 잘라놔도, 각기 다른 색의 옷가지를 걸쳐놔도, 값비싼 물건들과 친구를 해도, 이름을 만들어 부르며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어도, 딱딱하게, 무겁게, 다정하게, 대단하게, 매일매일, 순간순간, 기억하고, 감추고, 가두고, 묶어두어도, 자꾸만 먼지처럼 흩어지고, 증발하고, 도망쳐버리고 말아서, 이제는 그냥 얼음을 입에 넣고 또각또각 잘근잘근 씹어 혀로 돌돌 쩝쩝 굴려 녹여 호오 하고 입김을 만들어 그것들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 처럼, 불편함을 무릅쓰고 조각조각 슥삭슥삭, 문질러 비벼 가루로 만든다음 훅 하고 불어버릴 작정이다.

안전 + 제일

모두가 외롭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웃으니까 아무도 울지 못했다. 지하철엔 사람들이 읽다 만 신문이 있었고 지하철엔 신문이 읽다 만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화가는 '나는 내 작품이 너무 좋아요' 라고 말했다. 어느 사상가는 '나는 원래 나인 것을 먹는다' 라고 말했다. 한번은 웃었고 한번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연은 아름답다고 혼자 고백했을때 자연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자연에게도 아름다움에게도 나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길에 놓인 돌멩이를 발끝으로 찼을때 돌멩이는 왠일인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돌멩이에게 나는 그냥 또 다른 돌멩이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지렁이가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고 있을때엔 얼마나 불안할까를 생각했다. 왼쪽으로 구부리고 오른쪽으로 구부리고 매 순간 모든 행동들이 지렁이에게서처럼 나에게도 실존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렁이는 너무 위험해서 안전에 처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안전해서 위험에 처할 수가 없었다.

쉬운 화론

내가 그림에 사용하는 재료는 종이와 붓과 검은색 안료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이 재료들을 전통재료라 하기도 합니다. 종이는 지, 붓은 필, 검은색 안료는 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무엇이라 불러도 좋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종이는 희고 안료는 검다'라는 것입니다. 흰 종이에 검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붓은 그리려는 형상에 알맞게 적당히 굵고 적당히 긴 것이면 족합니다.

  붓에 검은색 안료를 묻혀 흰 종이에 바르면 선명하고 단단한 자국이 남습니다. 붓털에 힘을 주어 가느다란 검은 선을 긋기도 하고, 부드럽게 하여 넓은 면적을 칠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붓을 움직여 나타난 형상은 모호한 구석 없이 명쾌하고 간결합니다. 나는 그 느낌이 좋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붓을 잡은 내 손끝이 그리고자 하는 바로 그 길로 붓이 지나가 검은 자국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내가 사용하는 재료, 물질과 상호작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숭배하지 않고, 그것과 싸우거나 대결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사용합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형상을 잘 그려낼 수 있는 재료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그리려는 형상은 사람의 형상입니다. 사람의 형상은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바라는 사람의 형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몸매의 특별하지 않은 얼굴을 한 사람을 특징으로 그립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려고 골격과 동세가 잘 보이는 검은 몸을 하고 있고, 특별하지 않은 얼굴을 그리려고 표정이 없는 얼굴을 그렸습니다. 즉, 특별하지 않은 몸을 가진 특별한 사람을 그립니다. 표현은 위에서 말한대로 검고 분명하고 명쾌한 형상이면 좋습니다.

  사람의 형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존재에 관한 질문들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자연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의 감각과 경험, 기억을 동원합니다. 그러므로 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람이므로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에 관한 이야기, 즉 사람이라는 존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을 둘러싼 자연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즐겨 합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나에게 '나'라는 사건이 매우 흥미로운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흥미롭게 생각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입으로 전해지고 몸짓으로 전해집니다. 또 글과 그림으로도 전해집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말로 전해져도 글로 읽혀져도 또 그림으로 보여져도 상관 없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져야 할 필연은 없습니다. 말로 전하면 좀 더 생생하게, 글로 전하면 좀 더 진지하게, 그림으로 전하면 좀 더 간편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전달이 편리하고 상황에 적절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개괄합니다.